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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연혁

수원시 광교홍재도서관은 2014년 12월 23일 개관하여, 수원시민을 위한 문헌정보 제공, 문화활동, 평생교육 증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시민과 함께하는 도서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2013
  • 03. 28 도서관 착공
2014
  • 10. 27 건축설계 완료
  • 12. 23 도서관 개관

홍재(弘齋)의 의미

홍재는 정조(正祖)의 호. 정조는 학문의 최고의 경지가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뜻을 크게(弘)가져야 한다고 여겼는데, 세손시절 자신의 서재에 홍재(弘齋)라는 편액을 걸고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인정을 베풀겠다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 세상에서 제일 큰 서재, 정조正祖의 홍재弘齋
  • 정조(正祖)에게는 홍재(弘齋)라는 호가 있다. 임금에게 무슨 호가 있을까 싶지만 그는 홍재(弘齋)라는 호를 썼고, 인장에 새겨 자신이 보던 책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학자의 삶이었다. 임금이란 직함만 떼 버리면 그는 분명 조선 최고의 학자 중의 한 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0권이나 되는 그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세손시절부터 학문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고시공부 수준의 학문이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갈 큰 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조는 세손시절 자신의 서재에 홍재(弘齋)라는 편액을 걸고 스승인 서명응(徐命膺)에게 그 의미를 시로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서명응이 지은 「홍재기(弘齋記)」 는 이렇게 시작한다.
  • 왕세손 저하께서는 자신이 공부하고 휴식을 취하는 곳의 이름을 주합루(宙合樓)라 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의 도(道)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대개 최고의 경지는 인(仁)을 체득하는 것 만한 게 없습니 다. 인(仁)을 체득한다는 것은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신 '뜻을 크게 하라'는 것인가요?' 마침내 '홍(弘)'을 공부하는 곳에 편액으로 걸었다. 우빈객(右賓客) 신(臣) 서명응이 이전에 주합루(宙合樓)의 기문을 썼다는 이유로 '홍(弘)'의 의미를 시로 짓게 하시고 아침저녁으로 경계를 삼으셨다.
  • 정조는 이미 주합루(宙合樓)라는 서재를 두고 그곳의 기문을 서명응에게 짓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공부하는 곳에 '홍재(弘齋)'라는 편액을 걸었던 것이다. 정조는 학문의 최고의 경지가 백성들에게 인정(仁 政)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여겼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뜻을 크게 가지는 것이었다. 작은 일에 얽매일게 아니라 세상을 크게 보고 멀리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 다. 언제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정치가의 길이고 그것이 인정(仁政)을 베푸는 길이라 여겼다. 여기서 정조는 「논어」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뜻이 크고[弘] 굳세지[毅] 않으면 안 된다. 임누느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의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무겁겠는가?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으니 얼마나 먼 길이겠는가?'
  • 군주는 인정을 베풀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일은 군주 마음대로 그만 둘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죽은 뒤에야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평생을 가야할 길이니 얼마나 먼 길인가. 정조는 바로 여기서 '홍(弘)'자를 가져다가 자신의 서재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정보는 이 호를 평생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오로지 인정(仁政)을 베풀겠다는 큰 뜻을 펼치기 위 해 준비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고문헌연구가 │ 박철상 │ 국회도서관 │ 통로 제3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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